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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전자신문 칼럼: 옆으로 본 우리 고대사 이야기

사이람 이야기/ISSUE & NEWS

by (주)사이람 2015. 5. 2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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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이람 고객 여러분,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지난 5월 20일 전자신문에 홍순만 공동대표의 칼럼이 게재되었습니다.

홍순만 공동대표는 그간 사이람 뉴스레터를 통해 SNA와 관련한 다양한 칼럼을 발표하셨는데요

이번엔 평소 조예가 깊은 '우리 고대사'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셨습니다.


본 칼럼을 통해 홍순만 공동대표는 그동안 등한시 되었던 한반도, 중국대륙, 일본 열도의 접촉면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물산의 교류와 사람의 이동을 기준으로 살펴보는 시각을 제시하였습니다.








[칼럼] 옆으로 본 우리 고대사 이야기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게 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과 교류하고 이동하다가, 수틀리면 전쟁까지 한다. 생존은 상대가 있는 문제이고, 교류와 이동은 공동체 간의 관계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고대를 보면, 과연 얼마나 다르게 인식될까? 한반도, 중국대륙, 일본 열도의 사건들을 동북아시아 관계사 측면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물산의 교류와 사람의 이동을 기준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면 의외로, 그동안 기억의 저편에 방치된 것들이 살아난다. 인과관계로 엮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인과관계는 교류와 이동이 급증한 현대 역사에도 공히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깊다 하겠다. 


우리 고대사에는 그동안 통설의 바깥에 방치된 사건들이 많다. 해방 이후, 여러 이유로 강역사(疆域史)에만 몰두해서인지, 유독 한*중*일 접촉면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잘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북아 문명 건설에서의 동이족 역할, 신채호 선생이 주창한 삼조선과 삼한의 변화 과정, 고조선 수도와 한사군의 위치, 부여족 남하와 철제 왕국 가야와의 관계, 요서백제와 대륙백제 그리고 왜의 역할, 초원대국 고구려의 강역과 해양강국 백제와의 관계, 몽골의 기원과 고구려, 여진족의 기원과 신라 등이 그것으로, 모두 치열한 논쟁을 유발하는 사안들이다. 이제 위의 내용들을 교류와 흐름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한반도는 중국대륙, 만주, 일본열도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삶의 공간이 그렇다는 말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고대인들이 이동했고, 물산이 대륙과 해양 양쪽에서 교류되었다. 대륙공간은 만주와 요서에서 시작하여 유라시아 초원으로, 해양공간은 발해에서 시작하여 황해와 동중국해로 확대되었다.


초창기 물산의 주요 이동 공간은 발해였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문명의 바탕이 된 에게 해와도 비견될 수 있다 하겠다. 그리고 발해로 유입되는 강들은 요즘 말로 물류 하이웨이였다. 요동 발원의 태자하와 혼하, 요서 발원의 대능하, 난하, 요하, 한반도 발원의 압록강과 청천강 그리고 중원을 거쳐 흐르는 황하 등이 그것이다. 강과 바다를 통해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 동안부 그리고 중원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교류의 확대는 큰 나라를 출현시킨다. 2년여 동안 한나라와 싸웠던 고조선은, 요서-만주-한반도 북부를 경제권으로 하여 한반도 중남부와 중국대륙과 빈번히 교역했던 큰 나라였다. 따라서 고조선의 수도는, 만주의 물산이 강을 따라 집결한 뒤 발해로 빠져 나가기 좋은 곳에 위치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한반도 남부와 만주 그리고 중국대륙과의 물산 이동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을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고조선 수도의 위치로 지금의 중국 요녕성 요양 부근의 해성시를 지목했다. 요하 하구에 삼각주 갯벌(요택)이 형성되기 전인 고대를 상정하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그곳은 요동 발원의 강들과 요하가 합류하여 발해로 흘러들던 길목이었고, 한반도와 대륙 물산이 오가던 발해 뱃길의 나들목이기도 했다. 


발해의 경제적 패권을 두고 중국의 한나라와 동이족의 고조선이 부딪혔다. 안타깝게도 고조선이 패배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만주 송화강 유역과 한반도 전역으로 고조선 지식인들이 산포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미 BC4-5세기부터 고조선과 병립하고 있던 만주 송화 강변의 부여로 일부가 이동하고, 상당수는 서해 연안을 타고 한반도 중남부로 이동했다. 그에 따라 발해만과 남만주 일대를 지칭하던 마한, 진한, 변한이란 이름도 함께 이동한다.


마한, 진한, 변한은 고조선 수장(Khan) 들이 통치하던 강역의 이름이었다. 단군조선이 분화된 나라로, 汗, 干, 韓 등으로 음역되는 칸의 나라였다. 정치수장 마리가 통치한 마한, 군사수장 쇠블이 통치한 진한, 제사장 바리가 통치한 변한인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사연구초에서 그것을 말조선, 발조선, 신조선으로 상정했는데, 마리는 말(馬) 혹은 정상이란 의미이고, 쇠블은 번쩍이는 청동무기, 그리고 바리는 무당을 의미한다. 


마한, 진한, 변한이 이동하면서, 그 이름들에 내포된 태고의 기억도 함께 이동했다. 중앙아시아 발하슈 호에서 바이칼 호와 부리(부여)를 거쳐 발해로 이어졌던 북방 유목민의 기억이다. 쇠(金)는 그 기억의 정수리에 있던 상징물로, 한자로 음역한 진(辰)과 함께 이후 변진한, 대진국, 여진 그리고 신라, 금성, 쇠라벌, 서울 등으로 나타난다. 초기 가야가 동북아시아의 철제 왕국으로 기능한 것은 바로 쇠를 다루는 지식이 남달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리는 바리데기, 바리공주 등 현대국어에도 살아 있는 어휘로, 오늘날 남북한이 모두 보여주는 신기(神氣)의 원형으로 기능한다고 믿는다. 비록 발현 유형이 다르지만 말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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